클로드 모네 작품은 테크닉적으로는 원색 위주 색과 감각적인 붓터치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림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특징은 야외 풍경을 개인이 순간적으로 느낀 인상을 표현했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면 별로 특별할 게 없죠. 근데 왜 사람들은 물론 미술사학자들은 모네에 그렇게 환장하는 걸까요?
인상파 그림들은 객관적인 사물을 묘사하면서도 느낌이나 순간적인 인상 같은 화가의 주관성을 동시에 담아내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그림의 소재와 기법이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되어 거의 500년간 지배한 서양미술사와 '근간부터' 다른 점을 확실히 정립했기 때문입니다.
수월하게 이해하려면 클로드 모네 당시의 미술계 상황이 어떠했고 그 상황에서 모네의 그림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모네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시점이 19세기 중후반 프랑스인데요. 그때 제일 먹어주는 화풍의 그림은 이런 그림이었습니다.
이런 그림이 인정받는 이유는 50년전 다비드가 공고하게 한 신고전주의 느낌의 화풍이 아카데미라는 제도 속에 완전히 안착된 시기인 것뿐 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그 당시 프랑스 사람들도 그런 풍의 그림을 제대로 된 그림이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굉장히 보수적이었습니다. 인상파가 초반에 사회적 이슈를 많이 만들었음에도 인상파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판매되지는 않았던 이유죠. 어쨌든 그 당시 그림은 영웅이나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대상에 붓터치가 보이지 않을 만큼의 테크닉으로 완벽히 '재현'하는 것이 높은 평가를 받던 그림들이었습니다.
근데 이런 시대에 모네의 그림은 붓터치가 보일정도로 투박하고 그림의 소재도 바닷가나 들판 같은 자연의 소재였으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슈거리가 되었던 겁니다. 인상파 작가들은 눈에 순간적으로 느껴진 인상을 캐치해서 화폭에 담아내야 했으니 방안에 처박혀서 몇 주 몇 달을 몰두해 나온 그림과는 당연히 달랐죠.
인상파에서는 1886년이라는 연도가 아주아주 중요합니다. 이 때가 인상주의가 시작된 중요한 계기가 있었던 년도였습니다. 이 연도의 프랑스 살롱전 심사는 유난히 까다로웠습니다. 5천 점 중 3천 점이 탈락이었죠. 반발이 거세지자 나폴레옹 3세는 살롱 전 옆 건물에 낙선한 그림들을 전시하는 공간을 줍니다. 그림들이 이렇게 못 그렸다 보니 낙선될만하지 라는 속내로 열린 전시였지만 오히려 이때 마네의 작품을 통해 충격을 받고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 클로드 모네와 같은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이 인상파 사조를 만들어내는 주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림이 공개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이슈는 많이 되었지만 그 그림을 사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클로드 모네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삶도 궁핍했구요. 그런데 구원의 손길이 뻗혀집니다. 미국의 신흥 부호들이 그림을 사주기 시작한 거죠. 유럽에 그림 쇼핑하러 온 이 사람들은 유럽 사람들 입장에서는 보는 눈이 없는 문외한 들이었거든요.
자연을 그리는 소재가 당시 철도가 깔리고 여행이 많아지는 시대에 부합했고 순간의 인상을 담은 새로운 기법이 미국의 콜렉터들의 재정적 힘에 입어 점차 주류 미술사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소위 신인상주의파 화가들과 또 그를 이은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 같은 화가들이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라고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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